19년 9월 영양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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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경화 작성일19-09-05 18:22 조회1,201회 댓글0건본문
1. 무역 적자를 면하려고 마약을 판 영국
영국인들은 청나라의 차(茶)와 도자기와 비단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을 쏟아 부었는데,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무역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자국의 특산품인 모직물을 수출해 무역 적자를 면해보고자 했지만, 잘 팔리지 않아 실패하였다. 영국과 무역을 하던 중국 남부지방은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모직물이 필요 없었고, 동물의 털로 만든 모직물을 오랑캐들이나 입는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정부와 상인들은 어떻게 하면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에는 16세기 무렵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은밀하게 파는 아편을 구입하여 환각제로 복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29년 청나라 옹정제는 전국에 아편 금지령을 내리고, 아편을 피우거나 판 사람을 사형까지 처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법을 만들었으나 아편중독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한 번 아편을 피워 본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워댔는데 농민, 노동자, 기술자, 기생, 군인, 정부관리, 승려, 황제 등 계층을 불문하고 아편에 중독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던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대량으로 판매한다면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은 드넓은 인도 땅에 아편을 심어 많은 양을 생산했고,
1816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처음 수출량은 5천여
상자였는데, 계속적으로 늘어나 1838년에는 무려 4만 상자를 수출했다. 무게로 치면
약 300만 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인 조나단 스펜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에 성인 남성 중 약 10%가 아편을 피웠다고 하니
당시 아편중독의 심각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2. 아편전쟁의 서막
아편에 중독된 백성들이 많아지자 중국의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사람을 기용하여 아편중독을 근절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임칙서는 광둥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외국상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정식 포고문을 보냈다. [첫째, 외국 상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내 놓을 것. 둘째, 다시는 중국에 아편을 들여오지 말 것. 셋째, 이 내용을 문서로 남길 것. 넷째, 이를 어길 시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
그러나 이를 가벼이 여긴 영국 상인들은 아편 1천여 상자만을 내놓게 되고, 이에 격노한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이 머무는 곳을 포위하고 물과 음식 공급을 끊어버렸다.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영국 상인들은 결국 가지고 있던 아편 2만 상자를 내 놓았으나, 서약서는 쓰지 않은 채 마카오로 가버렸다. 임칙서는 아편 2만 상자를 해안가에서 모두 녹여 흘려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취한 영국 해군 병사가 임유희라는 중국인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서 반영 감정이 들끓고, 임칙서가 다시 나서 마카오의 영국인들에게 물과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그들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만두게 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끌고 가 마카오를 봉쇄했다. 이에 영국 상인들도 물러서지 않고 마카오 봉쇄를 뚫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이 해전에서 청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이 일로 임칙서는 영국과 더는 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한편 영국에서는 이참에 무력으로 중국을 굴복시켜 시장을 개방시키자는 의견이 득세하였고 결국 1840년 5월 영국 의회는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의 서막이었다.
3. 남경조약의 체결
재래식 범선과 낡은 군사 장비를 가진 중국군은 대포와 강한 해군 병력을 갖춘 영국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영국 함대는 중국 연안 도시들을 잇달아 점령했고, 청나라는 불리한 조건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결국 1842년 8월 ‘남경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둘째, 광저우, 아모이,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도시를 개항하여 영국과 자유롭게 무역한다. 셋째, 전쟁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되어 폐기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를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이며, 이로 인해 홍콩은 약 150여 년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4. 굴욕의 요리 탕수육
남경조약의 체결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자 홍콩과 광저우 등지는 장사를 통해 큰돈을 벌고자 하는 영국인들로 붐볐다. 그러나 중국에 온 영국인들은 먹는 문제로 불편을 겪었다. 개항 이전에는 주로 배나 영국인 상관에서 지내며 미리 가져온 음식을 먹었지만, 중국인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는 식사도구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포크에 익숙했던 영국인들이 길쭉한 나무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집어 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 문제를 급기야 중국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기에 이른다. 쇄도하는 영국인들의 항의와 비난에 중국 측 인사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고심한 끝에 영국인들의 입맛에도 맞으면서 서툰 젓가락질로 잘 집어먹을 수 있는 요리를 개발한다. 육식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식성을 고려하여 넉넉히 공급할 수 있는 돼지고기로 선택하고, 한입 크기로 썰어 튀겨냈다. 그리고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소스를 만들어서 곁들였다. 달고 신 맛이 나는 고기라는 뜻으로 이 음식의 이름을 ‘탕수육’이라 명명했다. 탕수육을 대접받은 영국인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극찬했다. 입에 쫙 달라붙는 맛이 일품일 뿐만 아니라 힘들게 젓가락질 하지 않고 포크로 찍듯이 찍어도 쉽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탕수육은 중국에 머무는 외국인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탕수육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 중 하나이다. 오늘 날 우리가 맛있게 먹고 있는 탕수육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아편전쟁의 치욕을 안겨준 영국인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만들던 중국인들의 심정이 녹아있다. 탕수육을 놓고 ‘부먹(소스를 부어서 먹는 것)’이냐 ‘찍먹(소스를 찍어서 먹는 것)’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탕수육 탄생에 담긴 중국의 굴욕적인 아픔의 역사를 먼저 알고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